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전형무소 학살 사건 (문단 편집) === 국가배상 판결 사례 === >"제가 7살인가? 평생에 우리 아버지를 딱 한 번 보았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일제시대 독립운동을 하였다 해서 범서(면) 입암리 집에는 일본 순사들이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해방이 되어 6·25가 터지자 그런 아버지에 대한 영광은 간 곳 없고… 저는 천하의 불쌍한 고아가 되어 있었습니다." > >([[이관술]]의) 막내딸은 평생 아버지 부재의 삶을 살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위태로운 삶을 지탱해주던 후견자들도 난리를 겪으면서 스러져갔다. 엄마 박가야와 두 언니(성옥, 정성)는 6·25 전란 중 행방불명되고 말았다. 비명횡사했는지 아니면 월북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19살에 시집간 큰언니 이정환은 결혼 2년 만에 보도연맹 학살 탓에 남편을 잃었다. 갓난애 하나를 키우며 50 평생을 가난하고 외로운 과부로 살아야만 했다. 작은아버지 이학술도 보도연맹에 가입했다가 전쟁 초입에 학살당했다. 오직 막내딸 경환이만 남았다. 그는 청소년기에 접어들 즈음 ‘천하의 불쌍한 고아’ 신세가 되고 말았다. >---- >[[임경석]], [[https://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53381.html|일본 경찰 따돌린 아버지도 딸의 얼굴이 궁금하단다]] [[이관술]] 유족은 2012년 “학암 선생이 국가 공권력에 억울하게 희생되었다”며 국가를 상대로 국가배상청구 소송을 냈고 2015년 3월 27일 대법원은 "수감 중인 사람을 전쟁이 발발했다는 이유로 총살한 것은 불법부당하다. 국가는 유족에게 1억 6000만원을 배상하라"는 확정 판결을 내렸다. 이관술은 가장 유명한 피해자라 모든 골령골 학살 피해자 유족들이 주목했고 축하해 줬다. >이번 소송을 자기 일처럼 도와주셨던 산내학살유족회 회원 분들에게 감사드린다. 그분들이 있어 외롭지 않았다. 저도 다른 분들을 돕고 싶고, 유족회에 힘을 보태고 싶다. >---- >손옥희(이관술 유족)[[http://m.ohmynews.com/NWS_Web/Mobile/at_pg.aspx?CNTN_CD=A0002095311|박현주, 전쟁 발발이유로 총살은 불법 부당]]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